임방울은 1905년 4월 25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679번지(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 679번지)에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 임경학과 어머니 김나주 사이에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임방울의 출생시기와 가족관계에 대하여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천이두 선생의『임방울』(1986, 현대문학사)과, 박황 선생의『판소리 200년사』(1994, 사사연), 그리고 최동현 선생의 『판소리란 무엇인가』1994, 에디터)에서 임방울 선생의 생년을 공통적으로 을사조약 체결 1년 전인 1904년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호적등본에 1905년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해를 공식적 기록으로 삼기로 한다.
임방울의 본명은 임승근(林承根)이다. 임방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는 다음의 두가지 추정이 있다. 어려서 울지도 않고, 방울방울 잘 놀아서 임방울이라 불렸다는 증언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임방울이 판소리하는 장면을 당대의 명창이 소리를 듣고 탄복하면서, "너야 말로 은방울이다" 라는 칭찬하면서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임방울의 아버지인 임경학은 소리로 이름을 떨칠 정도는 아니었으나, 인근에서 <비갑이 소리꾼> 정도로 인정받아 친지들이 모인 데서 벌어진 소리판에서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임방울이 태어날 무렵, 전남 지역에서 활약하는 판소리 명창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임방울의 어머니 쪽 계통이 단골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임방울의 어머니를 흔히 ‘김나주’라고 말하는데, 이는 나주 출신의 김씨, 즉 ‘나주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어머니와 누나가 무업을 행했다는 증언도 있다.
임방울의 외숙이 당대의 국창 김창환이다. 김창환은 전남 나주 출생의 고종, 순종 때의 명창이다. 그는 서편제 유파로 원각사에서 창극을 연출했으며, 협률사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흥보가 중에 <제비노정기>는 김창환의 독보적인 경지를 표현해낸 더늠이다. 김창환의 아들인 김봉이, 김봉학도 명창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임방울은 어려서부터 외사촌형인 이들에게 틈틈이 소리를 배웠다. 이 같은 환경이 임방울을 당대 최고 판소리꾼으로 키우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임방울이 열 살 되던 무렵에, 광주 송정리에 나주의 명창 박재실이 이끄는 창극단(唱劇團) 공연이 벌어졌다. 이 공연이 임방울의 판소리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본격적인 판소리와 창극 공연이야말로 소년 임방울의 동기를 유발시키는데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임방울은 박재실 문하에서 3년 동안 <춘향가>와 <흥보가>를 전수받았다. 임방울은 열두살 되던 해에 박재실의 창극단에 들어가 세달 뒤에는 무대에 서게 되었다.
박재실 창극단이 화순에서 공연할 때였다. 협률사에서 활동했던 공창식 선생이 공연장에 나타났다. 그 무렵 명창 공창식 선생은 소리로 이름이 크게 떨쳤는데, 고향인 화순 능주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공창식 선생은 음성이 맑고 높고 아름다우며 애원 처절한 서편제에 특기를 가진 분이었다. 임방울은 창극단을 그만두고 공창식 선생의 제자가 되어 판소리의 여러 대목을 배웠다. 화순 사람 남국일이 임방울을 후원하여,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며 소리공부를 했다.
임방울이 열일곱 살 되던 무렵, 남국일은 임방울을 유성준에게 보내 소리공부를 하도록 도왔다. 임방울은 유성준에게서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유성준은 뱃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씩씩한 느낌을 주는 동편제의 대가였다. 이 무렵 함께 소리공부를 한 사람들로는 성원묵, 조몽실, 오수암 등이 있다.
마침 임방울은 변성기를 거치는 중이어서 소리가 기대보다 시원하게 나오지 않아 심각하게 좌절하는 시기를 보냈다. 송정리에 살고 있는 매형 박치대를 찾아와 골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겨울부터 봄까지 소리공부를 하였다. 임방울은 다시 유성준 선생을 찾아와 <수궁가>와 <적벽가> 공부를 이어갔다.
임방울은 자신의 소리를 완성하기 위하여 지리산 쌍계사를 찾아갔다. 그곳에 토굴을 파고 독공을 시작 했다.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를 차례로 공부하고, '아니리'와 '발림'을 개발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구전심수로 선생에게 배워온 부분을 기억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훈련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임방울은 선생에게 배운 소리제에다가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개성을 보태기도 하였다. 구수한 송정리 사투리가 판소리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지리산에서 독공을 하던 중에 임방울은 집으로 내려오라는 전갈을 받게 된다. 집에서는 임방울에게 소리를 그만두고 결혼하라고 하였다. 임방을이 '득음을 하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 었다'고 고집을 하자, 부모님은 일단 혼인을 하고 소리공부를 계속하기로 허락하였다. 이렇게 맞아들인 부인이 한살 아래인 박오례 여사이며, 그 사이에 오희, 순희 두 딸과 아들 화택을 두었다. 임방울은 혼인 6년 후에 명창의 큰 꿈을 안고 상경 길에 오른다.
임방울이 큰 뜻을 품고 상경한 것은 25세(1929년 9월) 때였다. 매일신보사 주최 <조선명창연주회>에 명창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관객이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이 명창연주회에는 그의 외숙인 김창환 명창을 비롯하여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 등의 특별출연이 있었다.
무릎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두루마기, 땅딸막한 키, 약간 얽은 데다 별로 잘생기지 못한 얼굴. 무대에 오른 초라한 행색의 임방울은 자신의 역량을 다 발휘하려는 듯, 혼신을 다하여 소리를 불렀다. 그 소리가 바로 불후의 명곡 ‘쑥대머리’이다.
쑥대머리 귀신형용(鬼神形容) 적막옥방(寂寞獄房)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漢陽郞君) 보고지고.
오리정(五里亭) 정별후(情別後)로 일장서(一張書)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봉양(父母奉養) 글공부에 저를이 없어서 이러난가.
연이신혼(宴爾新婚) 금슬우지(琴瑟友之) 나를 잊고 이러는가.
계궁항아(桂宮恒娥) 추월(秋月)같이 번뜻 솟아서 비치고져.
막왕막래(莫往莫來) 막혔으니 앵무서(鸚鵡書)를 내가 어이보며,
전전반칙(轉轉反則) 잠 못 이루니 호접몽(胡蝶夢)을 어이 꿀 수 있나.
손가락으 피를 내여 사정(事情)으로 편지헐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임의 화상(畵像)을 그려볼까.
녹수부용(綠水芙蓉) 연(蓮) 캐는 채련녀(採蓮女)와
제롱망채엽(提籠忘採葉)으 뽕타는 여인네도 낭군 생각은 일반이라.
옥문 밖을 못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겄나.
내가 만일에 임을 못보고 옥중 원귀(寃鬼)가 되거드면,
무덤 근처 있난 돌은 망부석(望夫石)이 될 것이요,
무덤 앞에 섰난 남귀 상사목(相思木)이 될 것이오.
생전사후(生前死後)으 이 원통을 알어 줄 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운다.
- 1929년 녹음 Columbia 40085-B(20827)
- 1933년 녹음 Chieron 118-B 반주 박록주
- 1933년 녹음 Okeh 1620(K863) 장고 김종기
- 1937년 녹음 Victor KJ-1108(KRE235)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뿜는 통성에 쉰 목소리와 같이 껄껄하게 우러나오는 수리성을 섞은 임방울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장내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는 독특한 더늠에, 강렬한 전라도 사투리로 애절하게 내어서 청중을 사로잡아버렸다.
‘쑥대머리’는 <춘향가> 가운데서도 ‘옥중가(獄中歌)’의 한 대목이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옥중에 갖힌 춘향의 처연한 심사를 노래하자 장내는 절망적인 시대의 분위기와 연결이 되면서 청중들이 노래에 보내는 정서도 예사롭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유기룡씨는 동아일보에 “임방울은 독특한 더늠이 김창환씨와 흡사하여 계면조(界面調)의 대가”라고 평했다.
“14세 때 창에 취미가 있어 창극계에 들어가 명창 박재실 선생에게 <춘향전> <흥보전>을 배우고, 다음에 유성준씨에게 <수궁가>, <삼국지>, <심청전>을 배우고 난 다음에, 25세까지 독단적으로 공부하여, 서울서 박람회가 있어 시골서 단체로 서울에 올라와서 박람회에 참가하였다. 그 당시 나의 외숙이 국창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김창환 씨였다. 그 때 동아일보사에서도 <전국명창대회>를 하였다. 그 당시 나도 그곳에 참석하여 출연을 하게 되었는데, 비로소 그날부터 출세가 되어 박람회를 마친 뒤 ‘콜럼비아 레코드’에 1년간을 취입하고, 다음에 ‘삑터’에 2년을 종사하고, 그 다음 ‘OK 레코드’의 전속으로 8.15 해방의 날까지 계속하였다. 그 삼 회사에서 ‘쑥대머리’ ‘호남가’를 120만장 이상을 각시 회사에서 팔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외사촌형 김봉이, 김봉학 씨는 조선명창이었는데, 나는 그 유전성으로 흘러내려 자연히 창계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임방울, 나와 창극, <조선일보> 1956년 5월 28일)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준 송학원에서 임방울은 소년시절의 연인이었던 김산호주를 다시 만났다. 임방울이 소년이었을 무렵, 고용살이를 했었다. 산호주는 임방울과 동갑내기로 주인집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헤어졌고 산호는 결국 장성사는 부잣집 아들한테 시집을 갔다.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는데, 산호주는 그 사이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광주로 돌아와 요리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을 이루었고, 임방울은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서 숨어살다시피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때 임방울이 잠적해버렸다고 했고, 전속계약을 한 오케이 레코드사에서는 임방울을 찾아 나섰으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김산호주는 미색이 빼어나서 천하의 소리꾼 임방울의 발목을 이태동안이나 잡아두었다. 그런데, 산호주와 함께 지내는 동안 임방울의 목이 상하고 말았다 .크게 낙심한 임방울은 산호주에게 떠나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송학원을 떠나 홀연히 지리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임방울이 떠나고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으며, 임방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지리산으로 찾아 헤매었다. 토굴 속에서 독공하고 있던 임방울은 애써 산호주를 외면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산호주는 죽어가는 목숨이 되었고, 임종이라도 지켜보라는 사람들의 말에 토굴 속에서 나온 임방울은 이미 저승길에 접어든 산호주를 껴안고 슬피 울며, 진양조의 ‘추억’이라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불렀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은 어디로 향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럈던가.
그리 쉽게 가럈거든 당초에 나오지를 말았거나
왔다가면 그저나 가지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 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님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난 동무들은 백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보리오.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전생에 무슨 함의로 이 세상에 알게 되야서
각도 각골 방방곡곡 다니던 일을 곽속에 들어도 나는 못잊겠네.
원명이 그뿐이었던가. 이리 급작시리 황천객이 되얐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어데를 가고서 못오는가.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을 보고지고.
1930년 녹음 Columbia 40370-B(21499) 추억
1933년 녹음 Okeh 20068(K861) 추억(亡妻를 생각함) 장고 김종기
임방울은 6.25 이후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는 걸어서 광주까지 내려왔다. 오는 길에 북한군을 만나 포로로 된 적도 있었는데, ‘쑥대머리’ 한자리를 부르고 풀려났다고 한다. 광주에서 피난 생활하던 동안의 행적은 명료하지 않다.
임방울은 1954년 5월 21일, 釜山 범일동의 부산진 시장에서 가설극장에서 열린 <古典音樂祭典>에서 열창을 한다. 이 자리에는 줄타기의 달인이라고 불리었던 김영철이 특별히 출연하였다. 이 자리에서 임방울은 박록주등과 함께 <심청가>, <춘향가>를 공연, 절찬을 받았다.
임방울은 몇차례 일본공연을 가졌다. 50년대 후반, 임방울은 한국예술단 환영위원회 주최로 박귀희, 임춘앵, 임유행, 박왕진, 이진관, 안복진, 고미라 등과 함께 일본공연을 다녀왔다. 한번은 임춘앵 일행과 함께 <견우직녀>를 가지고 동경과 오사카에서 공연하였다.
이 공연 후 임방울은 급작스럽게 몸이 쇠약해진다. 임방울은 일본 공연에서, 당시로는 금기였던 조총련계에서 공연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임방울이 귀국한 직후 정보기관에 불려가서 한동안 시달렸다고 한다. 고수 주봉신 명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증언한 바 있다.
다른 증언에 의하면 1957년 4월 원각사(圓覺社)에서 <朴初月 문하생 발표회> 직후에 임방울의 건강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박초월 문하생 발표회>는 임방울이 김연수, 박귀희, 박봉선, 성우향, 한농선, 조통달 등과 함께 특별출연하여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애초에 이틀간 공연할 계획이었으나 4일간으로 연장되었다. 임방울은 이 공연 내내 기침이 심하고 숨이 차오르고 목소리까지 약해졌다.
1960년 봄, 부산 공연 때였다. 임방울은 무대에서 자신의 특장이었던 <쑥대머리>를 부르더니, <심청가> 가운데서 ‘심청이 선인들에게 팔려가던 대목’으로 바꾸어 불렀다. 장내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춘향가> 한 대목을 내더니, 다시 <수궁가>로 옮겨와 이것저것 마구 바꾸어 불렀다. 누가 말릴 틈도 없었다. 갑자기 얼굴에 핏기가 가시면서 임방울은 무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면서도 소리를 질러 내어 목구멍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해 가을, 임방울은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김제 공연에 나섰다. 그는 입버릇처럼 소리를 하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김제 장터에서 소리를 하다가 다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그길로 서울 초동 집으로 옮겨졌으며, 이듬해 1961년 3월 7일 밤,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임방울이 57세 되던 해였다.
임방울의 장례식은 국악인의 장례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 되었다. 그날, 2백여 명의 여류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상두꾼이 되었다. 소복을 한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지날 때 서민들은, 서민의 목소리 국창 임방울을 잃은 슬픔에 잠겼다. 김소희 명창을 포함하여 몇몇 명창들이 앞소리를 맡고 수많은 여류명창들이 떠나는 님의 상여끝자락을 잡고 뒷소리를 맡으며 흐느꼈다. 사는 동안 슬펐던 소리 광대의 화려한 마지막 장면이었다.
선도하는 트럭에는 삼현육각을 잡히고, 만장 수백 장이 늘어서 있고, 그 뒤를 소복한 여인들이 꽃상여를 메었다. 가장 한국적인 소리광대를 싣고 상여는 움직였다. 시청 앞에서의 노제를 거치고 그의 운구행렬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임방울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한(恨)의 소리와 함께 묻혔다. 어린 딸이 관속에 낡은 음반 한 장을 묻어 그 자리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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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창 임방울 장례 행렬 > |
1977년 8월에 송정청년회의소 주최로, <제1회 임방울명창기념 명창경연대회>를 열었으며, 이를 기화로 삼아 1999년에는 <(사) 국창임방울선생기념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2000년에 임방울에게는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3년에는 <(사) 임방울국악진흥재단>으로 통합하여 <임방울 국악제>를 지속적으로 운영하여 임방울을 기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임방울을 수식하는 호칭으로 ‘명창’에서 ‘국창’으로 옮겨와 불렸다. 그러나 임방울은 임금 앞에서 소리하기 위하여 벼슬을 받은 적도 없고, 1960년대 이래 국가에서 지정하는 무형문화재 보유자로서의 예우를 받아보지도 못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국창’이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임방울이 국창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임방울은 소리의 계통이나 법도를 중시하기보다 서민의 정서를 반영하고, 한의 심성을 잘 노래한 당대 최고의 가객이었다. 빼어난 성음과 목구성으로, 서민취향을 반영하여 처절한 서름조로 퍼버리고 통곡하면서 판을 장악하여, 민족의 한을 대변해 온 것이 아마도 임방울을 국창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예술가로 인정하게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임방울이 가객으로 활약하던 시기는 민족사적으로나 판소리사적으로 가장 어둡고 쓰라린 시기였다. 임방울은 질곡의 역사와 부침의 세월을 살아 온 민족의 한스런 정서를 온몸으로 울어 토해냈고, 핍박 받는 민중과 인정을 나누며 살다 간 소리꾼이었다. 서민의 사랑과 지지에 의존해서 판소리의 외길을 걸으면서, 한스런 가락으로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면서 판소리의 명맥을 지켜 온 소리꾼이었기에, 국창이라는 칭호, 국민이 내린 칭호에 값하는 국창이 되었던 것이다.
판소리와 같은 형태의 민중적 공연예술은 유동성, 현장성, 즉흥성을 속성으로 하고 있으며, 시대적 흐름과 청중의 요구에 따라서 예술의 내용과 형식이 변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판소리의 애호층이 변화하였고, 변화된 청중들의 판소리 취향을 판소리 가객들은 일정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송만갑, 정정렬, 임방울은 이와 같은 수용층의 변화와, 새로운 수용층의 취향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판소리의 내용을 거기에 맞게 적용시켜 자신의 스타일로 완성해낸 대가들이다.
특히 임방울에 있어서 그 변화의 정도가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임방울은 언제나 가난한 서민들 옆에 서서 활동한 예술가였다. 서민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서민들의 문제를 대변하고, 그들을 웃기며 울렸던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 임방울의 초상이다. 임방울 판소리의 사설과 음악적 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특징은 서민적 요소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임방울 소리는 서민에게 아주 친밀하고 서민의 애환을 다룬 노래이자 이야기이자 연극이었던 것이다.
임방울은 선천적으로 천재적인 성음을 타고난 가객이다. 그의 성음은 천구성에 수리성을 더 하고 있다. 천구성이란 높은 소리, 낮은 소리를 두루 구사할 수 있는 힘차고도 역량이 풍부한 성음을 말하며, 수리성은 약간 갈린듯하면서도 구수하게 곰삭은 맛을 풍기는 성음을 이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성음을 겸비한 임방울은 최상의 자질을 타고난 가객이다.
임방울은 자유자재한 성음에 성량 또한 풍부하여 막힌 데가 없었다. 下聲, 平聲, 上聲을 마음먹은 대로 구사해서 목청을 좌우로 제켜가면서 힘차게 뽑아내 들려주면 청중들은 모두 열광과 찬사의 추임새를 보냈다. 전통적인 소리목의 구사와 함께 임방울 특유의 푸는 목, 감는 목, 찍는 목, 떼는 목, 미는 목 등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청중을 휘어잡았다.
임방울의 소리에는 계면조의 기교 개발에 있어 당돌하기까지 할 정도로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경지를 보여준다. 임방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점이라 하겠다. 당시 웅장 고졸한 우조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임방울은 이러한 우조에 애련·처절한 계면조를 접목시켜 새로운 임방울 스타일의 소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동편제와 서편제는 판소리 법제를 말한다. 섬진강을 경계로 하여 동쪽은 동편제, 서쪽은 서편제로 나누어지고, 경기도 이남과 충청도에서는 중고제가 주로 불리어졌다.
동편제는 우조를 주장하며, 대체로 기교가 없이 단순 소박하나 웅장 호방한 가풍이다. 송흥록, 박만순, 송우룡, 송만갑, 유성준, 강도근 등의 명창이 동편제로 분류된다. 서편제는 계면조를 특히 잘 구사하며, 기교가 다양하고 애련한 맛이 짙은 소리 스타일이다. 박유전, 정창업, 이날치, 김창환, 이화중선, 정정렬, 박초월 등의 명창이 서편제의 대가들이다. 중고제는 경기 무가 및 경기 민요조의 소리가 판소리에 투영된 것이다. 김성옥, 이동백, 김창룡 등이 주로 불렀으나 지금은 맥이 끊기고 말았다.
임방울은 어려서는 외숙 김창환에게서 서편제를 익혔으며, 유성준에게는 동편제를 익히고, 나중에는 독자적인 자기 소리를 만들어서 ‘임방울제’로 소리를 하였다. 판소리의 법제 계보를 따진다면 임방울은 동편제에 속한다. 그러나 기교가 넘치는 그의 창조에는 애원 처절한 서편제적 요소가 짙게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그가 길러낸 제자들인 한애순, 장영찬, 성우향, 신평일 등도 동편제이면서도 서편제의 창제요소가 짙다.
임방울은 계면조를 가장 계면조답게 부른 명창이다. 임방울의 계면조 창법은 일제 강점기, 임방울이 살던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과 시대적 분위기에 잘 어울렸다.
임방울이 활동하던 당시엔 소리판의 환경이 변화했다. 일제 강점기로 들어서면서 기존의 판소리 애호가이자 후원자였던 양반층이 사라지면서 판소리 광대들이 설 자리도 사라져버렸다. 판소리 광대들은 자기 예술을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예전의 판소리 기반이었던 서민 대중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고도하게 우아해진 예술을 뒤로하고, 민중 취향의 판소리를 다시 선택하게 된 것이다. 임방울이 서민 대중에게 다가가는 판소리를 하였을 때 전략으로 택한 것이 바로 계면조였다.
임방울은 서민적이고 파격적이다. 사투리를 심하게 구사하면서 청중에게 다가간다. 외설적인 걸찍한 재담을 연행하면서 서민의 취향에 가까이 다가갔다. 예전 판소리에서는 판소리에 재담적 요소가 많았다고 하는데, 20세기에 들어서 점점 재담 전통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며, 특히 여류 명창의 경우 재담을 늘어놓는 것이 금기시되어 있다. 임방울 판소리는 판소리의 재담 전통을 잘 살리고 있다.
임방울 <수궁가>에서 ‘별주부 마누라와 하직하는 대목’의 걸찍한 재담을 함께 들어보자. 임방울 공연에 참여한 사람들의 전언이나, 실황음반에 함께 실려 있는 청중들의 반응을 조사해보면, 확실히 이 재담 대목에서 폭소가 많이 터져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임방울은 즉흥적 변개에 능한 예술가였다. 스승의 소리를 고집하다 보면 판에 박힌 소리를 하게 되지만, 임방울은 특별나게 스승에게서 배운 전통 법제를 고집하지 않고, 판에 따라 다양하게 변개하면서 판을 이끌었다. 임방울 식의 독특한 미의식으로 소리판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임방울은 소리의 계통이나 법도를 한편으로 존중하기도 했으나, 이보다는 자신의 선택과 민중층의 평가를 더욱 소중하게 여겼던 것처럼 보인다. 송만갑의 예에서 볼 수 있듯, 20세기에 이르게 되면 과거의 법통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많이 가시게 되었다.
소리판의 조건도 열악해져서 족보와 법통이 존중받는 분위기가 사라졌다. 임방울에게 있어서도 법통은 금과옥조로 삼아 보존해야할 것이라기보다, 자신을 살찌워줄 다양한 자양분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판에 임하여 자유롭게, 그 판의 성격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연행하는 것이 원래 소리판의 모습이었다. 그 전통을 임방울이 적극적으로 되살려냈다고 할 수 있다.
임방울은 전통적 의미에서도 현대적 의미에서도 진정한 작곡가였다. 임방울의 작곡자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준 노래로 앞에서 들어본 ‘추억(追憶)’을 들 수 있다. 이 노래는 임방울이 직접 만든 작품으로 당시에 대단한 인기를 누리며 사랑받았다.
단가 ‘명기명창(名妓名唱)’은 ‘팔도유람가’라고도 하는데 임방울이 작곡했다고 전한다. 멋있는 명기 명창을 데리고 풍류랑과 산천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하게 일생을 즐기자는 내용이다. 중모리 장단으로 짜여져 있다.
임방울이 섰던 자리는 화려한 무대보다 시골 장터나 강변의 모래사장 같은 곳이었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한을 노래한 음유시인이 임방울에게 걸맞는 칭호일 것이다. 식민지 민중의 한을 대변해주는 음유시인이자, 골계를 통하여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준 진정한 광대.
외롭고 슬펐던 삶의 길에서도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자긍심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는 고통 속에서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그가 남긴 예술은 아름답고 영원하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예술은 독창적이다. 그는 당대에 광대라는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예술인의 자존심을 꿋꿋하게 지켜, 사랑받는 광대 예술인이 되게 하였다. 애초 민초들 사이에서 생겨나 민초들 사이에서 성장한 판소리 본래의 존재 양식을 지켜오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임방울은 소중하다.
출처:국창 임방울(사단법인 임방울재단)
임방울의 쑥대머리
임방울의 소리감상: 편시춘, 녹수청산, 고고천변, 추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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