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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스캥 데프레 - Josquin des Prés

풀꽃(muse417) 2008. 7. 10. 09:39

조스캥 데프레 (Josquin des Prés, 1450년경-1521)


 르네상스 전 기간을 통해 배출된 작곡가들 중에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되고 있다. 뒤파이와 오케겜에 의하여 개척된 모든 분야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높은 수준의 음악을 많이 작곡하였다. 부르고뉴악파가 사라지고 플랑드르 악파가 그 뒤를 이어 전성기를 형성하기 시작할 때 나타난 작곡가가 조스캥 데 프레다. 출생지와 출생 년도에 관해 많은 설이 있으나 1440년 경 오늘날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지역인 콘데(Conde)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어린시절에 초기 플랑드르 악파의 거장인 오케겜에게서 음악수업을 받은 것이 조스캥 데 프레의 앞날을 큰 영향을 끼쳤다. 언제 거장인 오케겜에게서 음악수업을 받은 것이 조스캥 데 프레의 앞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언제 이탈리아로 진출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1459년에서 1472년까지 밀라노 성당에서 가수로 봉직한 것 같다. 1474년부터 12년간 밀라노의 갈레아로 마리아 스포르자(Galearo Maria Sforzza) 공작의 예배당에서 일하였으며 그녀가 암살되자 그의 형제 중 하나인 아스카니오 스포르차(Ascanio Sforzza) 신부 밑에서 일했다. 그는 매우 구두쇠였던 것 같으며 이때 작곡된 미사 “라솔파레미”는 밀린 급료를 달라는(Lascia fare a me)말에서 나왔다는 일화가 있다. 아스카니오는 우연곡절 끝에 1484년에 추기경이 되자 로마로 부임할 때 데 프레는 그를 수행하였고 그곳에서 그는 작곡가로서 점차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494년까지 추기경의 예매당과 로마 교황청 성당 사이를 오고간 것으로 되어 있다. 교황청의 봉직기간이 끝나자 프랑스로 건너가 1501-1503년 사이에 루이 12세 궁정의 가수가 되었다. 1503년에는 파라라(Ferrara)의 에르콜레 데스테 1세(Ercole ld'Este)일가의 교회 상가대장으로 이사악을 제치고 임명되었다. 페라라궁에서 조스캥이 남긴 작품은[Miserere mei, Deus]와[Virgo salutifere]의 2개의 모테트로 알려지고 있다. 그 외 Missa[Hercules Dux Ferrarie](미사 페라리공 헤라 큐레스)도 이시기에 작곡된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조스캥은 1503년 7월 임명 받은지 1년도 안되어 당시 페스트의 대유행으로 갑작스럽게 페라라궁을 떠나야 했다. 오브레히트가 그를 이어 페라라궁의 악장이 되었으나 그는 1505년 페스트로 사망하게 된다. 조스캥의 작품에서 오케겜과 오브레히트의 작곡기법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카논의 사용, 선율을 빌려와서 사용한다든지, 마지막을 향해 몰아치는 기법은 오케겜의 기법에서 온 것이다. 조스캥은 오브레히트의 모방기법을 더욱 체계적으로 모든 성부에 적용하여 전곡을 통일하는 기법으로 사용하였다. 

1504년 고향 콘데로 돌아와 노틀담 성당 참사회장으로 일하다가 1521년 영광에 가득찬 생애를 마쳤다. 조스캥은 당시의 수많은 음악가로부터 “우리시대 최고의 음악가”,“음악가들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마르틴 루터는 그를 가장 좋아했으며 많은 작곡가들이 음의 지배를 받지만“그는 음표의 주인”,“음표는 그가 원하는데로 움직인다”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조스캥은 중세와 근대의 전환점에 있는 작곡가라는 점에서 몬체베르디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헨델이 바로크와 고전파시대 사이에 있는 것 같다. 17곡의 미사곡은 르네상스음악의 한 정점을 구축한 걸작이며, 약 70여곡에 달하는 샹송도 간결명료한 기법으로 표현된 아름다움의 극치다. 그의 작품 중에서도 [무장한 병사](L'homme arme Masses)[혀여 말하라](Pange lingua)[라솔파레미]등의 미사곡과 모테트[마리아]는 불멸의 wrkvna으로 빛나고 있다. 그 외 100여곡의 모테트, 세속성악곡이 약 70곡정도 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르네상스시대의 모차르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출처 : corean
글쓴이 : blue2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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