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명인 신쾌동의 거문고산조
신쾌동(申快童)(1910∼1978)
거문고산조(散調)의 대가로 원명 신복동(申卜童), 호는 금헌(琴軒). 전라북도 익산출신이다.
9세 때에 박생순(朴生順)에게 양금(洋琴)을, 12세 때에는 박학순(朴學順)에게 가야금(정악·산조)을 배웠고, 13세 때에 정일동(鄭一東)에게 거문고 정악을 사사받았으며, 그 후 당대의 명금이던 김경남의 제자 김용근에게 상영산과 중영산을 사사받았다.
16세 되던 해에 거문고산조의 창시자인 백낙준(白樂俊)문하에 입문하여 산조를 처음으로 배웠다.
4년간 백낙준가락을 이수한 후 고향인 익산에서 고창으로 거처를 옮겨 산조음악에 전념하고 있을 때, 당시의 명창 임방울(林芳蔚)·이화중선(李花仲仙)·이중선(李仲仙)의 권유로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소재의 줄포가설무대에서 처음으로 거문고산조를 연주하였다.
그뒤 목포의 목포극장에서 명창 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박녹주(朴綠珠)와 공연하였고, 1933년 5월 10일에 후진양성과 창극운동의 전개를 목적으로 창립된 조선성악연구회에 가입하여 많은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가 활동한 무대는 서울의 부민관(府民館)·단성사(團成社)·동양극장·조선극장, 평안북도 평양의 금천대좌(金千代座), 함경남도의 함흥극장 등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황오익(黃伍翼)·강성재(姜成在)·김병두(金兵斗)·양기평(梁基平)·조위민(曺偉敏)·김기환(金基煥)·김영제(金泳帝)·윤경순(尹京順)·정옥자(鄭玉子)·구윤국(具潤國)·김무길(金武吉)·성기군(成基君)·이창홍(李昌弘)·이세환(李世煥)·김효순(金孝順)·김영욱(金永旭) 등을 들 수 있다.
30분 미만의 곡이었던 스승 백낙준의 진양조 - 중몰이 - 중중몰이 - 엇몰이 - 자진몰이 장단 뒤에 희몰이 장단의 선율을 첨가하고 가락을 창작하여, 연주 시간 50분의 곡으로 거문고산조를 확대시켜 융성하게 한 공이 크며 '새타령'과 '팔도유람가'로 거문고병창을 시도하였다. 1967년 7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예능보유자(1967.7.16.∼1977.11.29.)로 지정받았다. 1977년에 녹음한 〈현금곡전집 玄琴曲全集〉이 있다.
거문고산조는 1896년 당시 20세였던 충남 강경 출신의 백낙준(1876~1930)이 부친의 구음을 거문고에 얹어 처음으로 연주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지지부진 상태에 있는 여러 허튼 가락을 백낙준이 정리하여 산조라는 곡명을 붙인 것이라고도 한다.
거문고산조는 박석기(1899~1962), 김종기, 신쾌동에게 전승되어, 현재는 박석기의 제자 한갑득으로 이어지는 한갑득류와 신쾌동류가 거문고 산조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학문과 덕을 쌓는 선비들이 책과 더불어 가장 아껴, '금(琴)과 서(書)'를 선비 수업의 필수 과목으로 삼을 정도로 모든 악기의 우두머리로 여겨 이를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칭했다. 선비의 절제되고 품격 있는 높은 기상을 나타내는 현묘한 琴道의 악기로서 숭상되어 온 거문고로 민간의 세속적이며 발랄한 감정을 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백낙준이 당시의 관습을 깨고 거문고산조를 만들었을 때, 그는 선비사회에서 매장될 각오였다 한다. 그러나 봉건적 신분질서가 해체되고 악기에 대한 계층적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면서 그는 선비사회의 질탄에서 벗어날 수 있었거, 거문고산조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거문고산조가 세속의 질서를 담은 음악이라고 하지만, 거문고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이미지와 음색과 탄법 때문에 거문고산조에서는 왠지 모를 남산골 샌님 딸깍발이의 기개와 염결, 꼬장꼬장한 지조 같은 선비 정신이 느껴진다.
편집 참고 출처: 重要無形文化財調査報告書 26―거문고散調―(文化公報部文化財管理局, 1967). 〈曺偉敏〉
한국전통음악대전집 국악의 향연 10-11 거문고산조 해설, <이재화>
한국전통음악대전집 국악의 향연 2 살아있는 선율의 신비 - 한국의 기악 -,중앙일보사. <윤명원, 윤중강, 김영운>
* 신쾌동 명인의 거문고산조 시디를 계속 들어오다가 어제는 예전에 LP판으로 듣던 기억이 나 턴테이블을 서재로 옮겨 휴대용앰프에 연결해 들어보았다. 시디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길이도 더 길고 빠른 부분에서 또 다른 감흥이 새롭게 일었다. 다행히 예전에 녹음해둔 것이 있어 아침 출근길에 차에서 또 들어보았다. 그런데 휘몰이 등 뒷부분이 빠진 것 같아 아쉬워 저녁에 내친 김에 아예 거실의 인켈 오디오를 옮겨 설치를 다시 하고 들으면서 새로 녹음을 했다. 얼마전에 새로 샀던 SONY 컴포넌트는 거실에 주고 결국 구닥다리를 가져간 셈이 되었다. 그래도 집사람이 인테리어는 생각하지 않고 본체 장식장만 놔두고 큰 스피커를 가져간다고 구시렁거렸다. 덕분에 피아노도 옮기고 가구도 옮기며 청소를 했다.
서재를 대충 치우고나서 새벽 1시 30분을 넘겨 신쾌동 명인과 거문고산조에 대해 정리를 해본다. 신쾌동 명인의 거문고산조에 끌려서 말이다. 성씨가 같으니 그래도 가까운 조상님 기리는 마음이라 위로를 삼으며. 또 마침 어떤 날을 기념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문고의 거장 신쾌동(申快童, 본명은 신복동, 1910∼1977).
거문고로 입신의 경지를 이룬 신쾌동의 거문고 향제줄풍류 가락과 거문고산조 그리고 독창적인 거문고병창은 한국음악사에 남았다. 신쾌동은 거문고 술대를 손에 낀데다 괘까지 움직이면서 음계를 내고 거기에 창을 하는 거문고병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귀재로 알려졌다.
신쾌동 산조는 그 짜임새가 탄탄하고 거문고라는 악기 성격에 가장 잘 맞게 가락이 짜여져 있어 천박하지 않으면서 오장육부를 뒤집는 남자의 눈물과 슬픔이 느껴진다고들 말한다.
신쾌동류는 휘모리 자진모리 등이 남성적이고 힘이 들어 여성 연주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신쾌동이 만들어 낸 가야금산조를 아는 사람들은 감탄을 아끼지 않는다.
익산 삼기면 오룡리에서 태어난 신쾌동은 소리를 잘하고 풍류를 즐기던 아버지 신선조씨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적부터 율(律)에 관심이 많았다. 9세에 정읍 출신의 박생순에게서 1년동안 양금을 배웠고 12세에 여산과 익산 부근에 살던 박학순에게서 가야금을 배워 그때 벌써 재동 소리를 들었다. 13세부터 15세까지는 다시 풍류의 여러 악기에 능통하였던 박생순에게서 단소와 대금을 익혔는데 후에 단소의 명인 전용선(전추산)에게 단소풍류와 산조가락을 배웠다.
거문고를 탈만한 연령인 15세에 이르자 신쾌동은 정일동 김용근에게 거문고풍류를 배우게 된다. 처음으로 거문고를 배울 때는 무슨 맛인지 몰랐기 때문에 별로 취미가 없었으나 잊었던 거문고가락을 찾기 위해 40리나 떨어진 이리의 율계(律契)를 찾아가 그 율계의 10여명 회원과 함께 앉아 풍류합주를 한바탕 타고 돌아올 때면 거문고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율계 회원 중 금치선생이 신쾌동에게 금헌(琴軒)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17세에 김소례씨와 결혼하고 이 무렵 부친이 충남 강경에 있는 당대의 명률(名律) 백낙준(1876∼1930)을 찾아가 아들에게 거문고산조를 가르쳐주도록 간청, 여산의 신곡사에서 백낙준에게서 4년동안 거문고산조를 배웠다. 이 때부터 신쾌동에게 거문고가락을 배우려고, 장단 한 번 맞추려고 신쾌동 집을 찾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으며, 이들은 신쾌동이 외출해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여기에서 신쾌동선생의 수제자 김영재교수(전남대)의 제자인 송영국교수(백제예술대)는 신쾌동선생에 대한 잘못된 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아버지 신선조는 장님이 아니었고 집에 있던 수류탄이 터져서 팔을 잃고 한쪽 눈이 반실명상태가 됐다는 것.
신쾌동선생이 고창사람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덧붙인다. 익산사람 32명이 모여 만든 삼이계의 창립자이긴 하지만 고창 최초의 율계인 육이계(육례 중 두번째가 악이다는 뜻에서 칭함)의 창립자로서 당시 육이계 활동이 왕성했을뿐 아니라 신쾌동이 고창에서 3∼4년 머물렀던 것이 고창사람이라는 설을 낳았다는 것. 김제는 천석꾼 만석꾼이 많아서 사랑방이 너덧집에 그쳤지만 오천석꺼리의 중농민이 많은 고창지역은 사랑방 있는 집이 30가구 정도나 되고 예인을 우대하는 등 오랫동안 머물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고창에서 연을 맺은 백관수씨는 한민당 소속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게 되고 이 때 신쾌동선생을 서울로 데려 갔다고 말한다.
서울에서 조선성악연구회에 몸 담고 기악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이동백명창에게서 적벽가를 배우고 송만갑 정정렬명창에게서 소리를 틈틈이 익혔는데 선생의 목구성이 좋아 서로 소리를 가르치려 했다고 전한다. 이 때 친분이 두터워진 임방울 명창의 소개로 오케레코드사에서 21세 때 거문고산조를 처음 취입했다. 한편 빅타 OK레코드사에서는 정정렬 이화중선 임방울 박녹주 명창들과 함께 소리반주를 거문고로 연주했다. 그 당시 레코드를 취입할 때 대금반주에는 진도출신 박종기명인이 맡았다.
이후 6·25를 전주에서 맞았던 신쾌동은 첫 연주회를 1953년 미국공보원에서, 1959년 두번째 거문고독주회를 원각사에서 가져 큰 호평을 받는다.
1957년 해방이후 처음으로 임방울명창과 한주환, 국립국악원의 김의연 등이 참가했고 춘향가와 거문고 독주 및 반주 등을 3개월동안 순회공연했던 재일교포 위문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선생은 광복 이후 최초로 열린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박소희 김소희 김월하 등 민간음악인들과 함께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세우고 교사로 정진한다.
1964년 국악예술학교 재직 당시 아시아음악학회 초청으로 미국의 30여 대학교를 순회하여 대환영을 받았으며 이 때 지영희선생(1909∼1980)과 더불어 국립관현악단 창단에 힘을 모아 줄풍류합주를 지도했고 시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고창을 잊지 못하고 자주 다녔던 선생은 담관암을 얻어 세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77년 11월 22일 끝내 정릉 댁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선생이 아꼈던 후학들은 선생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마석리 모란공원(미사리조정장 가는 길)에 모시고 20년 뒤 선생을 뒤따라간 사모도 같이 모셨다.
97년 11월 25일, 신쾌동선생 서거 20주기 추모 연주회가 있던 이 날 저녁 선생의 부인은 공연을 보지 못하고 홀연히 숨을 거뒀다. 이 날 학술대회와 공연을 주관했던 문하생들은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빈소로 가서 선생 옆에 사모를 모셨다. 공연 수익금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2남 4녀 중 넷을 선생보다 먼저 보내고 혈육으로 아들 딸 한명씩이 있지만 60대의 누나가 온전치 못한 남동생을 거두고 있는 형편이기에 선생은 물론 부인의 마지막도 제자의 몫이었던 것이다.
거문고의 기미에 민감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3-4일 뒤의 날씨를 예측할수 있을 정도였다는 거문고의 독보적인 거장 신쾌동. 그는 가난과 고독속에서 평생을 굴하지 않고 오직 율(律)을 위해 살다가 죽었다.
*신쾌동류 거문고산조보존연수회
선생은 살아 생전 신쾌동류거문고산조보존연수회를 만들었고(76년) 이 연수회 직인을 자신의 임종을 지킨 수제자 김영재교수(전남대 예술대학 국악과, 신쾌동류거문고산조 보유자 후보, 연구회 회장)에게 넘겨주었다. 김교수는 TBC(동양방송)에 고정 출연할 때 재주와 기능은 비록 떨어지더라도 인간성이 좋은 제자들은 출연시키는 등 제자들을 키워주려 노력하는 등 인간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했던 선생을 기억한다. 어렸을 적 서울 국악전수회관 옆에 살면서 신쾌동선생도 자주 뵈었던 송영국교수(백제예술대학 전통예술과, 연구회 사무국장)는 가난한 살림에서도 기분 내키지 않으면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의 연주를 마다 했던, 175㎝ 키에 풍채가 좋아 그 많은 예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선생, 민간음악의 체계화를 위해 공부하라는 채찍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을 잊지 못한다.
제자들은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음악적인 것을 지켜나간 선생을 기리며 선생이 작고한지 20년이 된 97년 익산에서 20주년 기념 공연을 하려 마음먹었다. 그러나 선생이 살아 생전 사 주신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먹었던 제자들이 갹출한 자금만으로는 50명 이상이 서는 공연무대를 익산에서 꾸리기에 너무 벅차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벌이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김무길(한국국악협회 이사) 남현우(서울국악예고 강사) 이형환(대구 예술대교수) 한민택(교원대 강사) 등 신쾌동류거문고산조 이수자들과 이용우(경기도립국악단원, 연구회 총무) 등 40여명의 보존연수회원들은 선생의 거문고산조와 거문고병창을 보급하는 외 익산의 선생 생가를 복원하고자 한다. 추모비라도 세우고 비록 생가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지만 집을 살 수만 있으면 그 곳을 전수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기에 익산시와 전북도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다.
1층에 선생의 유품을 모아 전시하고 2층에 학습관을 두어 신쾌동류거문고를 배우려 는 사람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활용할 것을 염원한다. 전통음악은 선생의 정서가 배어있는 곳에서 배워야 가락 그 자체뿐 아니라 삶과 예술을 같이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쾌동류거문고산조보존연구회는 해마다 선생 추모 음악회도 열 예정이다.
자료협조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
경 력
▲1939년 전북국악대회에서 수상.
▲1954년 대한국악원 이사로 취임.
▲1958년 제 1회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 수상.
▲1959년 원각사에서 개인거문고 독주회를 가짐.
▲1960년 국악예술학교 거문고교사로 취임.
▲1965년 서울 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입단.
▲1967년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 16호 거문고산조 기능보유자로 지정됨. 5·16 민족상
국악부문 심사위원.
▲1971년 국악예술학교 교사 사직. 거문고산조 보존연구회 회장 취임.
▲1977년 현금곡전집(창명사) 출간. 별세.
내용출처 : [기타] http://www.gojb.net/culture
집필자 : 네이버 sohyuk2
신쾌동 - 거문고산조(30:03)
* 광주 현대백화점에서 구입했던 음반이다. 쿨 에디트 프로그램으로 두 트랙을 합쳐서 한 파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