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향년 81세 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카라얀의 일생은 그야말로 영광과 좌절로 점철된 삶이었다.
시골의 무명 지휘자에서 더 이상 정복할 세계가 없는 음악의 제왕으로 군림하기까지 카라얀은 성공과 실패와 시기와 찬사의 연속이었다.
출세를 향한 야심과 순수한 예술성의 한가운데에서 불멸의 신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1963년 10월 15일 밤 베를린 필하모니 홀은 열광의 도가니 이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연주가 막 끝난 것이다.
이 날의 주인공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1824년 베토벤 자신에 의해 초연되었을 때의 열광이 재현된 것 같았다.
누구도 그의 명성을 따를 자가 없는 지휘의 제왕에 오른 카라얀
아마 세계의 지휘자들 가운데 카라얀만큼 신비의 대상이 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예술의 열정
1978년 그는 다시 두 번째 베토벤 녹음을 시작.
이번에는 스튜디오가 아닌 베르린 필 하모니홀에서 전곡을 녹음하여 금세기 최고의 걸작을 만든다.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종신 상임지휘자로 임명되다.
베를린 필은 1989년 그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를 사임할 때까지 30년 넘게 카라얀의 수족처럼 움직였다. 콘서트홀과 녹음 스튜디오 혹은 유럽과 미국 등지의 연주여행 등, 카라얀이 일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베를린 필이 동행했으며, 이들이 등장하는 곳에선 언제나 20세기 음악의 신화가 꽃피워졌다.
카라얀의 업적을 평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1935년 아헨가 극장 음악총감독에 취임함으로 나치당에 입당함을 카라얀은 출세를 위해 입당했다고 고백했다.
이 일은 카라얀의 생애에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1956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을 시도했을 때 미국 시민과 언론으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 선발을 둘러싼 단원들과의 충돌로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관계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84년 마침내 카라얀과 오케스트라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카라얀의 재정적인 욕심까지 거론되어 둘 사이의 분쟁은 더욱 심화되어갔다. 1988년 4월말 베를린에서 이미 약속된 연주회를 취소하고 일본으로 연주 여행을 갔을 때 베를린에서는 공공연히 그의 후임자에 대한 말이 돌았다.
1989년 4월 24일 베를린 필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 사임하고 열정적으로 일에 몰두했던 카라얀 이었다.
7월 27일 잘츠부르크 대성당 광장에서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개회 연주로 거행될 베르디의 ‘가면무도회’를 오전동안 연습을 한 뒤 7월 16일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근교의 아니프에 위치한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그의 시신은 아니프 마을 오르트스프리베호프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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